Hwang Gyung-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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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현의 풍경: 빛과 어둠, 파르마콘-논리적 전복과 마주하기 _ 김남수(2019) 2019-12-09

황경현의 풍경: 빛과 어둠, 파르마콘-논리적 전복과 마주하기

애니메이터(2019)

김남수(안무비평)

 

#1. 언젠가 빛을 다하고 끊어질까/ 어쩌면 어둠이 더/ 편할 수 있어 오히려/ 그게 더 자유로울 수 있어/ Life like filament (<필라멘트> 중에서 김범수 피처링 부분)

 

#2. “어둠은 빛의 왼손, 어둠은 빛의 오른손” (어슐러 르 귄, SF장편 <어둠의 왼손> 중에서)

 

이곳, 이 도시에서, 황경현 작가가 그린 거리 풍경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서울이 아니더라도 지구의 어느 밤으로 추정되는 거리는 도시 전체를 그을음처럼 어둡게 움켜잡고 있고, 지나가는 행인들 실내에 있는 사람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그리고 어둠에 노출된 사람들 은 그림자로 화해 버린다. 그 반대로 어둠이 거리를 포획하여 그 도시 안으로부터 빛을 주리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문당하는 빛이다. 어쨌든 지나가는 모든 타인들, 보이지 않는 그 순간 불분명한 존재를 향해 어디론가 흩어지면서 그림자는 다시 슬쩍 빛으로 화한 것처럼 나타난다.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어울렁더울렁 한다는 것은. 빛과 그림자가 당연히 서로 호환이 가능하다는 듯이 빛은 희미하다가도 그림자가 더할 수 없이 환하게 타오른다. 어떤 광시증[光視症, photopsia] 같은 역설이 환시된다. 황경현 작가의 그림에서 콘테의 터치는 이 그림자의 부드러운 조형과 흔들리는 환시에 직접 작용한다. 이처럼 눈을 감고 있거나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빚어지는 빛과 그림자 사이의 변증법이 유독 두드러지고, 관객이 들여다보는 시간 만큼 그 가변하는 환시는 끊임없이 작동한다.

뱀의 똬리처럼 한꺼번에 빛났다가도 캔버스 표면의 물질적 느낌에 풀죽은 듯이 순식간에 빛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다가도 그림자는 그 명멸의 반복 속에서 근원이 되는 어둠 속으로 소환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빛줄기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정령처럼 몰려들기 시작한다. 우주로부터 오는 몇 광년의 별빛도 모두 죽었는데, 이 빛줄기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도시 한켠 어디에 숨어 있다가 어둠의 짙은 우물 속에서 흘러나온 것인가.

황경현 작가의 전시 <애니메이터>는 빛의 명멸이 드라마틱하면서도 어둠의 힘 앞에서 어딘지 초조와 불안이 있는 듯 보인다. 태초로부터 전송되어 오는 별빛이자 우리 마음 속에 불켜지는 윤리적 정초로서의 별빛도 없기 때문일까. 그저 도시의 풍경이 있고, 마치 도시 전체가 불타버리는 과정인 동시에 잿더미 상태의, 그러나 온전히 형상을 유지한 채의 시각풍경처럼 어딘가 비현실적인 데가 있다. 그러면서도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배후의 어둠은 수상한 행동으로 관람객들을 놀라게 한다. 길항하고 접변하며, 서로 물들 듯이 교환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방인이 배회하듯, 그리고 불이 환한 야시장으로 걸어가듯 무엇인가 꿈인지 현실인지 혹은 꿈 속에서 깨어난 꿈인지 모를 야릇한 시공이 주체를 잃고 밤풍경의 형식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저 멀리, 혹은 저 아래, 다른 색으로 보일지 모를 침전 속의 밤의 내부 공간을 배경으로 타인들의 몸은 흔들리는 빛과 그림자의 음영에 덮혀 있다. 터치는 무조음악처럼 거칠고 정처없으며, 행로는 무리수적 단락으로 끊어지며 이어진다. 그때부터였다. 이번에는 환청이 들리는 것은. 빛이여, 너도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로 몰려서 가고 있구나. 단단한 바닥 없이 부유하듯 밑변을 박차고서. 어둠이여, 너는 그대로 있음에도 가장 빠르구나. ‘있음의 속도를 뽐내면서.

이것이 애님[anim]의 풍경인가. 여기서 애님이란 정령적인 것이다. 빛이 됐든, 어둠이 됐든 그 사이의 매개가 됐든지간에 이 회화에는 분명히 음[, Yin]의 정령적인 징후와 양[, Yang]의 정령적인 징후가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징후들의 복수적 배치로서 회화적 시도는 동아시아에서 의경[意境]에 가깝다. 의경이란 결국 풍경으로서의 객관적 세계상이 심경[心境]으로서의 주관적 세계상과 어울려서 함께 교융되어버린 상호주관적 풍경이다. 이는 안에도 있고 동시에 밖에도 있으며, 저 바깥의 풍경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는 어떤 태도가 내비친다. 그 상처에 거처하는 것을 애님 애니미즘설을 따라서 마나’ ‘하우’ ‘쿨라’ ‘가망같은 비인칭의 자율적 생명력으로 옮겨도 될 것이다 이라고 하면 어떨까. 분명히 이 흑과 백, 빛과 색, 은유와 물질은 서로 맞서는 형국이면서도 결국 생명력을 감지하는 시학으로 올라서는 회화임에 틀림없다.

황경현 작가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어둠을 통해 애님의 시학적인 것의 풍경을 그리고 있고, 그 풍경에는 마치 근대의 시간이 다 소진되고 자기의식의 중심이 사라졌다는 판단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그 특별한 시계가 멈춰버리고 새로운 시보를 알리는 그 무엇이 등장해야 한다. 전복적이고 결정적인 밤이다.

그런데 잠 못 드는 사람에게 이런 밤은 길어라. 피곤한 사람에게 이런 길은 멀어라.

황경현 작가의 그림 속에서 빛과 그림자의 얼룩은 한없는 기다림의 스탠스일 수도 있고, 모든 것이 끝난 이후지만 아무것도 오지 않는 순간적인 스탠스일 수도 있다. 요는 밤은 길게 뻗어 있고, 순간은 너무 큰 섬광에 눈먼 어둠 같은 것이다. 빛과 그림자의 얼룩 아래, 마침내 거리가 증언하기를 이러하다. “우리 세계는 다시 태어나야 해. 마침내 재생되어야 해.” “모든 것이 끝났지만, 삶의 유혹으로부터 보호받을 장치는 없어.”

아직 황경현 작가의 이 근대의 마지막 밤은 취약하면서 길고도 긴 것이다. 음울하게 끝없이 늘어선 방들로 가득한 무한호텔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숨이 가쁘고 누군가 끝이 있다고 얘기해주기를 소원한다. 이토록 고독하고 이토록 무형의 중압감 아래에 처한 풍경, 급격히 펼쳐지는 비슷비슷한 논리들이 그 어둠의 그 있음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무력화되는 풍경이라고 할까. 반박할 수 없는 드라마틱한 밤, 그 빛과 그림자는 모든 도처마다 편재해 있는 어둠이라는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무의식의 영향 하의 여기저기에서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워준다. 어둠은 무의식으로서 배후에 있음이다. 그럴 때마다 빛과 그림자는 음과 양이 각자의 몸체를 뒤채듯이 그 접경에서 극에 달하여 서로 위상을 맞바꿔버린다. 빛이 그림자가 되고, 그림자가 빛이 되어버린다. 파르마콘[Pharmacon],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나쁜 것이 어느덧 좋은 것이다. 독과 약은 하나의 다른 부분이며, 그 부분 속에 전체가 담겨 있다. 이처럼 그 둘, 즉 빛과 그림자는 그 접경에서 가장 강렬하게 타오르는 필라멘트 같은 긴장이 파르마콘을 의식하여 일찌감치 팽배해 오르고, 서로 곁을 내주면서 결국 반대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일어나 버린 것. 경계대비의 그 경계는 필라멘트가 끊어질 때의 명멸 같이 느껴진다. 끝날 때까지는 영원한 것이다. 그만큼 황경현 작가는 콘테로 그려내는 그 어둠이 아무것도 터치하지 않은 종이의 흰 여백을 섬광처럼 비치게도 하고 동시에 서로 손을 맞잡은 것처럼 보이게도 한다.

 

#3. “그러니 어둠의 속도는 빛의 속도보다 빠를지 몰라. 빛이 있는 곳에 늘 어둠이 있어야 한다면, 어둠이 빛보다 먼저 나아가야지.” (엘리지베스 달, <어둠의 속도> 중에서)

 

어둠의 권능. 어둠에는 속도가 없고, 그것은 그저 빛이 없는 텅 빈 공간일 뿐이란 항변은 비-아인슈타인계 아마추어 물리학에서는 먹히지 않는다. 어둠이 가장 힘이 쎄다.

황경현 작가의 밤의 풍경 현상학은 도시 밤불빛이 잠시 눈부시고, 그 춤추는 빛의 속도감에 사로잡히는 듯하면서 동시에 그 빛 뒤의 어둠 속에서 다시 미세하면서도 거대한 움직임을 시사한다. 그 아래로부터의 도도한 흐름이 콘테 가루로 하여금 피조물로서의 빛을 감싸게 하고 결국 부화시킨다. 밤은 일종의 알이다. 황경현 작가의 작업은 그 밤이 선물하는 어둠의 속도에 의해 깨어나 관람객들이 시인이 된 것인 양 이런저런 몽상을 자극시킨다. 우리는 어리둥절하여 아직 이를 투시하지 못하고 그저 나이브하게 경험할 뿐이다.

작가의 이 선험적인 풍경은 지그시 압도하면서 사람들에게 머리 쓰지 않고 겪어내게 한다. 이 어딘지 태초적이면서도 도시적이고, 또 어딘지 신화적이면서 동시에 모던 이후의 풍경은 껍질이 깨어진 상태다. 이윽고 이 도시의 외피 그 아래 도사린 대지, 그리고 그 껍질 벗겨진 땅의 속살까지 깊이 파고들 듯이 그림이 내려가고, 저 바닥없음[groundlessness]까지 밀쳐내고 더 안쪽 깊숙이로 파고든다. 그림은 완전히 목탄의 덩굴손을 뻗어서 저 천정에서 바닥까지 공간을 덮을 기세이고, 그림은 어느덧 밤 자체가 되어버린다. 밤이 전시장 공간을 엄습하는 넝쿨의 방식이다. 대지미술처럼 폭 싸버린다는 것이다. 밤이 세계를 그렇게 하듯이.

얼마나 어둠이 가진 있음의 속도가 빠르면, 어어 하는 순간!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일까. 이번에는 좌우로 거대한 벽화처럼 수평적인 흐름 속에서 전모를 알 수 없게, 그럼으로써 문득 사라져 버린다. 음적인 정령의 징후들과 양적인 정령의 징후들도 그 정체를 알 수 없이 그 있음이라는 정지 상태의, 우주에서 가장 빠른 스피드를 절제된 채로 즐기는 것만 같다. 얼쑤! 하는 소리조차 없고, 추임새도 없다. 그저 숨죽인 채 그 있음에 편승하고, 어둠의 배 밑에 바짝 달라붙는다. 떨어지면 죽을세라. 작가에게 그래도 징후들은 징후들이어서 그림들을 한참 보고 있으면, 표면상의 검은 색 너머로 어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미 넋이 나간 관람객은 빙의된 82년생처럼 야생의 침묵을 행사한다.

황경현 작가의 어둠의 속도는 짐짓 빛의 무절제한 질주들, 빛무리의 폭주를 방기하는 듯하나 이미 하나의 그립속에 거머쥔 상태처럼 보인다. 그립감속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배후령을 의식하게 한다. 정령들이 날뛰는 빛과 그림자는 이미 무질서하게 아름다움 패턴들이고, 빛의 잔상들이 어둠 속에서 타오른다. 회화가 자신의 우주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극점들을 알고 있다. 극점을 벗어나는 순간, 빛과 그림자는 자리를 서로 바꾼다. 맞은 편을 떠다니면서.

저 그림 안에는 그러한 어둠의 비전이 있다.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어둠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빠르게 그곳에 이미 있다. 황경현 작가는 우리에게 그 파르마콘의 논리적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어둠이여, 빛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