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 Gyung-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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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현의 검은 그림, 그 시대적 의미 _ 이윤희(2017) 2019-12-09

황경현의 검은 그림, 그 시대적 의미

 

 

이윤희(청주시립미술관 학예팀장)

 

 

화가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의 눈을 빌어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황경현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며 고즈넉하게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 바쁘게 움직이며 어느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이다. 그가 그려내는 모든 장면들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뽐내거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기보다, 목적지로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지점들의 풍경인 것만 같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망막을 스치고 지나가는 연속일 뿐 시선을 사로잡을 이유는 없는 광경들에 황경현의 시선이 머무른다.

황경현이 그려내는 풍경은 검다. 검은 화면이지만 화면의 구석구석에서 번쩍이는 빛은 인공적인 조명을 바라볼 때 그러하듯 눈을 피곤하게 만든다. 걸음을 재촉하는 군중으로 가득한 그의 화면에는 억눌린 피로감이 가득하다. 다채로운 색감을 소거해버린 흑백의 화면은,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고 다가올 필요도 없는 순간의 회화적 표현인 것처럼 느껴진다.

황경현이 풍경을 바라보는 이러한 태도는 19세기 말 인상주의자들의 시선에 비견될 만하다. 종교화의 일부로 출발한 17~18세기의 풍경화나,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는 낭만주의 풍경화와는 달리, 인상주의자들의 풍경화는 일상 속에 스치는 장면을 잡아낸 것 같은 구도를 선보였다. 이는 당시 상용화되기 시작했던 카메라가 가능케 한 구도임과 동시에 대도시에서 상점이나 익명의 인파가 거니는 거리를 구경하는 삶이 가능해진 것과 관계가 된다. 산업화의 진전에 의한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가 개막되고 대도시가 생성된 시대, 이전보다 많은 계층이 여가를 누리는 삶이 가능해졌고, 생계를 위한 시간이 아닌 남는 시간 동안을 즐기는 중산층의 모습이 거리 곳곳에 눈에 띄기 시작하는 시대, 이 시대를 증언하는 시선이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상주의자들의 시선을 당대의 시인 보들레르는 산책자(flâneur)라는 말로 설명했다.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거리를 거닐다 예기치 않게 눈에 들어온 어떤 장면을 유유자적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주의자들의 화면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상주의의 시대는 도시계획에 의해 시원하게 뻗은 대로에 늘어선 대형 건물들과 그에 따른 화려한 볼거리들이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때였다. 변화되는 도시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었고, 세계는 마치 진보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중후반, 그리고 20세기 초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나은 세계가 이룩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대였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몰하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꿈에 부풀었고, 어떤 것이 진보를 위한 더 나은 방법인가에 대한 논쟁들이 풍요롭게 이루어졌다. 나의 다음 세대가 나보다 더 진보된 세계에 살 것이라는 것을 믿었고, 그러기 위해 현재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를 열망했으며, 그러한 희망의 근거가 이전보다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이 지나 21세기의 초반을 살아가는 우리는 물질적으로 더욱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과거보다 현재가 더 진보했고 미래에 더 진보할 것이라는 낙관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기술의 진보를 허덕이며 따라가도 삶이 근본적으로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고, 나의 다음 세대가 나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살 것 같지도 않은, 출근 시간에 맞추어 막 실은 물건처럼 지하철에 탑승했다가 다시 우수수 하차하여 목적지를 향해 달리듯 걸음을 재촉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린 세대, 이것이 지금의 현실로, 근대 이후 앞날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 최초의 세대가 지금 살아가고 있다.

황경현은 인상주의자들처럼 느릿느릿 걸어 다니며 즐거이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의 화면에는 바쁘게 출근하거나 지쳐서 퇴근하는, 힘들게 장사하는, 피곤함을 잊기 위해 밤거리를 쏘다니는 익명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것은 불안하다. 대개 그의 화면에 원근법이 과장되어 있는 것조차 화면 속 인물들이 느끼는 심리적 속도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선가 쏟아져 나오거나 어디로 쏟아져 들어가는 기울어짐이 원근법의 강조로 더욱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작가에게 유의미한 사람들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익명을 유지하는 관계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러한 시점과 무관하지 않다. 휩쓸려 움직이는 것만이 자신들의 사명인 듯 걸음을 옮기는 인물들이 화면에 가득한 것이다.

작가이자 그 자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는 생활인인 청년작가 황경현은 바쁜 사람들에 섞여 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춘다. 흘러가던 풍경을 한 순간에 붙들고, 의미 없이 과거로 흘러가던 풍경 한 장면을 눈에 새긴다. 인파의 한 사람으로 휩쓸려가다가 문득 멈춘 황경현의 시선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속한 광경이었던 그 장소와 인물들을 생경하게 혹은 조금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엉뚱하게도 그의 검은 화면들 앞에서 괴테의 한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낭만주의를 열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파우스트에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파우스트박사가 절대 말하면 안되는 금기의 문장 멈추어라 세상아, 너 참 아름답구나!”를 발설하여 곤경에 처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세계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 “멈추어라 세상아, 너 참 아름답구나!”하는 표현은 황경현의 작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황경현의 시선은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순간이 지나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숨가쁘게 삶을 이어가는 시대의 한 장면 속에 작고 작은 의미를 불어넣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검은 화면은 황경현이 잠시 멈추게 한 세계의 한 순간이다.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불안함을 느끼거나 슬픔을 느끼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