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 Gyung-hyun

Review

황경현의 ‘드로잉 세계’ _ 류병학(2018) 2019-12-09

황경현의 드로잉 세계

류병학 미술평론가

 

드로잉의 배경인 관광지, 터미널, 지하철, 골목길 등은 20여년간 10여 군데의 지역을 옮겨다니며 내가 지나왔던 공간들이고, 그 공간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살아온 나의 정서를 대변한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나의 삶은 그 자체로써 작업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 2015년 대안공간 눈의 황경현 개인전 <흑백공간> ‘작가노트중에서

 

필자가 황경현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17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개최된 <플랫폼 아티스트>에서였다. 당시 그는 검정 콩테로 그린 거대한 드로잉 두 점을 전시했다. 필자는 그의 드로잉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물론 그 이유들 중 하나인 드로잉의 크기도 한 몫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강열한 드로잉만큼 독특한 설치방식도 뇌리에 박혔기 때문이다.

 

황경현은 일종의 두루마리형식으로 제작된 드로잉을 벽면에 펼쳐놓은 방식으로 설치했고, 또 다른 드로잉은 전시장 벽면과 바닥을 이용하여 L자형으로 설치해 놓았다. 특히 L자형으로 설치된 드로잉 위에는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와이? 왜 그는 드로잉 위에 비닐을 씌운 것일까? 혹 콩테로 작업한 드로잉이기에 먼지나 관객이 실수로 발로 밟아 발생할 훼손을 방지하기위해서일까?

 

오잉? 그런데 황경현어 드로잉 위에 비닐을 씌운 이유는 오히려 관객이 드로잉을 밟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와이? 왜 그는 관객에게 드로잉을 밟으라고 친절을 배 푼 것일까? 하지만 필자를 비롯 당시 전시장을 방문한 그 어느 관객도 그림을 밟지 않았다. 왜 우리는 그림을 밟지 않았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란 일명 감상금지법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황경현이 드로잉을 L자형으로 설치한 것은 기존 작품 감상에 똥침을 놓고자 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형식적 탐미주의 접근법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발로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을 희생시켜서라도 관객의 형식적 탐미주의 감상법에 딴지를 걸고자 했던 황경현의 의도는 빗나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거대한 콩테 드로잉을 형식적 탐미주의 접근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의 그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림의 알맹이를 독해하고자 했다고 말이다.

 

필자가 황경현의 작품을 두 번째 본 것은 양주 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777 레지던시를 찾았을 때였다. 당시 남도문화재단의 정홍석 사무국장과 배수현 주임도 황경현 작가를 만나기 위해 레지던시를 방문했었다. 올해 남도문화재단에서 시행한 <전국 청년작가 미술공모전>에 황경현은 선정되어 수상을 받은바 있다. 그리고 그는 남도문화재단의 후속 지원사업으로 <컨설팅 지원 사업>에 수혜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황경현은 남도문화재단의 전문가와의 매칭 프로그램에 필자를 추천했고, 필자는 남도문화재단의 제안에 동의했다. 따라서 필자는 황경현 작가와의 만남을 통해 작가론을 생산하는 것이 임무였다. 남도문화재단의 정 사무국장과 배 주임이 필자와 황 작가의 만남 자리에 동석한 것이다. 대부분 문화재단 관계자들이 탁상행정에 안주하는데 반해 남도문화재단 관계자들은 현장방문을 하나 필자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경현 작가는 우리를 레지던시 건물 내에 있는 777갤러리로 안내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전시장에 그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전시장 곳곳에는 그의 콩테 드로잉부터 비속어 매입공모를 통해 제작된 <Drawing XXX> 그리고 일명 찌라시작업인 <지라스>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함께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황경현의 일명 흑백그림2013년부터 시작된다. 그의 <노우즈 휴먼(Nose Human)>(2013) 시리즈는 켄트지에 콩테(Conte on Kentpaper)로 그린 그림이다. 그것은 지하철 역사와 지하철 내부의 사람들에서부터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쇼핑몰의 사람들, 공항의 사람들, 주점의 사람들, 서울역 광장에서 대치하고 있는 시위대와 경찰, 광장에서 집회하는 사람들, 대로에서 시위하는 사람들과 주변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다양한 풍경에 등장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마치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단처럼 백색 비닐봉투로 보이는 것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다. 물론 그것은 작품제목에서 밝혔듯이 의 형상을 하고 있다. 와이? 왜 황경현은 사람들을 일률적으로 코의 형상을 한 비닐을 뒤집어씌운 것일까? 초상권문제 때문이 아닐까? 문득 서울 중심가를 가득 메운 2013년 촛불시위가 떠오른다.

 

하지만 2014년부터 제작된 황경현의 <드로잉(스트롤러Drawing(Stroller))>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전에 머리에 씌워진 백색 마스크를 벗었다. 물론 그의 드로잉에 출현한 인물들의 얼굴은 마치 초상권을 의식한 듯 명료하지 않고 흐릿하게 처리되어 있다. 2015년 대안공간 눈의 <흑백공간>과 갤러리 1898<흑백군중>, 2016년 스페이스 ADO<Drawing Dome>KSD갤러리의 <시대역마>, 2017년 세움 아트 스페이스의 <도시산책>, 2018777갤러리의 <카르바마제핀>에 전시된 그의 드로잉에 캐스팅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황경현은 작품제목에 드로잉과 함께 괄호를 빌려 스트롤러(Stroller)’를 표기해 놓았다. 혹자는 그것을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산책자(Stroller)’로 읽기도 한다. 만약 보들레르의 산책자가 목적 없는 보행자라면, 황경현의 (그림 속) 산책자는 목적 있는 보행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점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흑백 그림의 대상들은 비판적 산책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21세기 도시의 풍경들이다. 자본주의 안에 현대인들이 산책으로써의 목적 없는 보행자가 아닌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이주, 이동해야 하는 타의적 유목민들의 풍경인 것이다.”

 

필자는 그 사례로 남도문화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본 황경현의 신작 <드로잉(스트롤러)>(2018)을 들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어느 큰 홀에 사람들로 가득 차게 그린 그림이다. 필자는 그곳이 적잖은 사람들을 수용할만한 곳이며, 거대한 화분이 있는 것을 보고 대형건물의 로비로 추정했다. 필자는 그들에게 계절에 대해 물었다.

 

배 주임은 두터운 점퍼들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겨울인 것 같다면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필자는 정 사무국장에게 그들이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물었다. 정 사무국장은 저기 그려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있지만 한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서 점퍼 팔에 있는 마크를 보니 철도노조 사람들로 보인다고 말했다. 황경현은 정 사무국장의 추론에 놀라면서 서울역에서 철도노조의 파업 장면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진술했다.

 

우리는 황경현의 또 다른 신작인 <드로잉(스트롤러)>(2018)를 함께 보았다. 그것은 3미터에 달하는 드로잉으로 벽면에서 바닥으로 길게 늘어지게 설치되어 있었다. 필자는 남도문화재단의 관계자들에게 무엇을 그린 것인지물었다. 정 사무국장은 거대한 대형마트를 위에서 내려다 본 그림이라고 말했다. 황경현은 맞다면서 최근 양주에 개장한 대형마트를 방문해 그린 그림이라고 답변했다.

 

필자는 배 주임에게 콩테 드로잉을 벽면에서 바닥으로 휘어지게 설치되어 있는데 어떤 느낌이 드는지물었다. 배 주임은 마치 족자처럼 말려져 있는 풍경을 일부 펼쳐놓아서 풍경이 끊임없이 계속 이어져나갈 것으로 보인다고 답변했다. 정 사무국장은 그림이 휘어져 있어서 그런지 풍경이 왜곡되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황경현의 드로잉은 대형마트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정 사무국장의 말처럼 그 풍경은 왜곡되어져 보인다. 와이? 왜 그는 대형마트의 풍경을 왜곡시킨 것일까? 3미터의 길이에 그려진 풍경은 사실 인간의 한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풍경이다. 따라서 그는 기계의 힘을 빌려 그 광경을 찍고, 기계가 찍은 파노라마사진을 보고 작업했단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의해 작동되는 카메라의 시선은 파노라마를 촬영할 때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 왜곡된 사진을 재구성해 그리면서 또 한 번 왜곡시킨다. 그렇게 두 차례 왜곡된 풍경은 벽면에서 바닥으로 휘어지게 설치되어 있다. 황경현의 독특한 설치에 대해 필자는 지나가면서 황경현의 목소리를 빌려 형식적 탐미주의 접근법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라고 중얼거렸다.

 

최근 황경현은 777갤러리에서 <카르바마제핀(Carbamazepine)>이라는 독특한 타이틀로 개인전을 개최했었다. ‘카르바마제핀은 의약품으로 디스키네지아(Dyskinesia)’라는 운동장애의 치료제로 알려져 있다. 일단 황경현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자.

 

디스키네지아는 뇌가 기억하고 명령하는 움직임이 몸이 기억하는 움직임과 일치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장애를 말한다. 뇌와 몸 중 어떤 것이 교란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들은 이미지 포화상태의 스크린 앞에 선 동시대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점의 좌표에서 기계의 시각을 레퍼런스로 풍경들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시간의 흐름을 한 번에 담아내지 못할 때, 인간적인 시도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출력된 이미지에서 풍경을 거니는 군중들은 2차원 원근법을 무시하며 작고 커지기를, 그리고 일그러지기를 반복한다. 망각 한 것을 새로이, 그리고 반복적으로 채움으로써 회화적 표현, 수의적 움직임에 다가가고자 카르바마제핀을 투약한다.”

 

디스키네지아와 카르바마제핀은 황경현이 자신의 작품을 언급하기위해 차용한 의학 용어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황경현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의 작품과 설치방식에 어떤 문맥이 형성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그의 드로잉이 시각적 왜곡(디스키네지아)’라는 운동장애를 가졌고, 그가 작품의 운동장애를 해결하기위해 바로 벽면과 바닥을 이용한 '설치제(카르바마제핀)‘을 투약했다고 말이다.

 

황경현은 시각적 왜곡(디스키네지아)’라는 운동장애를 치료하기위해 '설치제(카르바마제핀)‘ 투약한 사례는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설치작품 <방주(Void Drawing)>(2016)가 그것이다. 그는 전시장 벽면들에 미러시트지를 붙여 놓고 바닥에 조명을 설치하여 도시의 유흥 불빛과 같이 빛이 화려하게 산란하는 방주의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그는 그 환상적인 공간에서 야광봉을 빙글빙글 돌리며 빛으로 드로잉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황경현은 <방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그것은 가상세계 너머로 들어가려는 시도이자, 스크린으로 비유되는 세계에서 그리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되묻는 행위였다." 그런데 그림이야말로 가상세계의 원조가 아닌가? 황경현은 작년에 <방주>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 <>((2017)을 작업했다. 그것은 30(100) 가량 되는 전시장의 벽면과 바닥에 미러시트지를 부착해 놓은 설치작품이다. 황경현은 그 환상적인 공간 한가운데 바닥에 3.3(10)의 면적에 드로잉을 설치해 놓았다.

 

바닥의 드로잉은 3x3칸 형식의 그리드로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은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9개 패널을 본뜬 것이란다. 따라서 드로잉의 면적은 의 단위를 확장한 그리드로 전이된 셈이다. 이 점에 대해 황경현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평은 가상과 현실이 뒤 섞인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법, 부정하는 방법, 동화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그곳에 정착하는 법을 익히는 일 같기도 하다. -붕 떠있지 않기 위해서.”

 

황경현은 <>에 들어선 관객이 자신의 드로잉을 발로 밟을 수 있도록 비닐을 씌워놓았다. 그런데 드로잉이 설치된 공간 자체가 이미 하나의 거대한 드로잉(<>)이 아닌가? 흥미롭게도 황경현은 작품명에 드로잉을 늘 명기한다. 콩테 드로잉이건 오브제 작품이건 설치작품이건 그에게 모든 작품은 드로잉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드로잉은 무엇인가?

 

내 작업 안에서 드로잉은 단순히 그리기(소묘)’가 아닌 완성에 도달하기까지의 그리기, 조각하기, 대화하기, 움직이기, 상상하기, 사유하기 등 모든 창작과정들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드로잉은 동사로서의 드로잉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은 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두고 올 그림을 그린다.”

 

필자는 남도문화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황경현의 안내를 따라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그의 작업실은 4평 남짓해 보였다. 그런데 그는 크지도 않은 작업실 안에 방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왜 넓지도 않은 작업실에 방까지 만들어 놓았을까? 왜냐하면 그는 작업실이 곧 그의 거주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는 작업실에서 작업하고 생활한다. 그는 따로 거주지가 없다.

 

만약 그가 레지던시를 하지 못하면 부산에 거주하시는 부모님 댁으로 이사해야 한단다. 따라서 그에게 레지던시는 단순히 작업공간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먹고 자고 생활하는 거주공간인 셈이다. 이를테면 그에게 레지던시는 '작업 따로 생활 따로'인 출퇴근 하는 레지던시 입주작가들과 달리 '작업실이 곧 생활공간'이라고 말이다.

 

필자가 방문한 그의 작업실은 소박했다. 그의 살림살이는 꼭 필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단출했다. 옷도 사계절 에 꼭 필요한 양만 가지고 있다. 필자는 그의 생활태도를 보고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원룸에 거주하는 필자의 바램은 살림살이 전부를 여행용가방 하나에 담는 것이다. 그런데 황경현은 필자의 바램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일명 '그림말이'의 비하인드 스토리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그는 좁은 작업공간에서 큰 그림을 그리기위해 돌돌말린 형식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의 작업실 벽면에는 수십장의 메모들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 자신에게 하는 말들이었다. 필자는 한 문장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작가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작동하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