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 Gyung-hyun

Article

다가올 그림을 기다리며 _ 심소미(2017) 2019-12-09

다가올 그림을 기다리며

경기유망작가 생생화화 신진 - Something New(2017)

 

심소미 (독립큐레이터)

 

거울 방에서의 바닥 그림

 

황경현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이다. 콩테를 사용해 종이 위에 흑백 음영이 짙은 도시풍경을 그린다. 그는 올해 여름 서울의 한 전시장에서 근작 회화를 다룬 개인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작업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의 존재가 다소 위태로워 보인다. 작업실의 한켠 콩테 먼지 때문에 분리시킨 공간에는 예전처럼 먼짓 가루가 날리지 않는다. 대신 그의 작업실을 채운 것은 주문한 거울시트지 롤들과 바닥을 그리드로 구획한 마스킹 테잎 자국이다. 신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일 작업 <(m²)>은 거울시트지로 에워 쌓인 거울 방의 형식을 갖는다. 100, 30평가량 되는 전시장의 벽면과 바닥은 거울 효과가 나는 거울시트지가 전체적으로 부착된다. 이 공간에서 그림은 벽면에 단 한 점도 걸리지 않는다. 이 기다란 벽면을 뒤로하고 그림이 자리하는 곳은 전시장의 바닥이다. 그는 왜 흰 벽면을 시트지로 덮어씌우고는 그림을 바닥으로 내몬 것일까? 화가로서 자기 부정을 선언하기라도 한 것일까?

 

신작 <>을 얘기하자면, 애초의 계획이었던 <역마>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마>는 도시의 야경과 정처 없이 어디론가 향하는 군중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명 빛이 발광하는 가운데 발걸음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도시공간의 적막함과 동시에 불온함을 전하는 드로잉 작업이다. 전시 구상 시 그는 <역마>를 주제로 한 회화를 전시장의 벽면과 바닥에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림이 중심이었던 공간이 어떠한 계기로 휑한 거울 방으로 전환되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배경에는 앞서서 진행했던 개인전 도시산책”(2017)이 자리한다. 지난 전시에서 회화의 프레임을 입체적으로 변형하거나 바닥에 설치하게 되면서 이후의 신작에서는 이 형식을 동일하게 반복하기보다 새로운 실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러한 전환에는 화가가 다뤄온 내적 형식과 더불어 외적 형식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다. 그의 그림에서 내적 형식이란 콩테라는 전통적인 드로잉 질료를 종이에 문질러 이를 하나하나 화면에 고착시켜온 방식을 말한다. 외적 형식에 있어서는 동시대적 환경에서의 지각과 경험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과 상호적 관계가 고려된다. 도시에 대한 관찰은 표준화된 일상에 대한 화가의 시선이자 견해이다. 이 시선은 도시풍경에서 나아가 세계의 형식적 조건, 세상의 프레임과도 연계되며 곧 그림의 외적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동시대성에 대한 고찰은 그가 회화 작업과 별도로 해온 타매체 작업에서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그림을 그려오며 작가는 틈틈이 시대적 변화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영상, 설치 작업을 선보여 왔다. 이는 2016년에 선보인 <노래방 프로젝트>, <방주(Void Drawing)>, <지라스(らす)>등 물리적이고 비물리적 장소성을 넘나드는 작업들로, 이번 신작 <>과도 밀접한 영향 관계를 형성한다. 게 중 <방주><>과 형식적인 관계망을 지니는 작업이다. 작가는 전시장에 거울시트지를 둥글게 에워 쌓고는 바닥에 조명을 설치하여 빛이 화려하게 산란하는 방주의 공간을 구현하였다. 이 작업에서 눈여겨볼 것은 작가의 야광봉 퍼포먼스이다. 야광봉을 든 작가가 거울 표면을 레이저로 구멍을 뚫듯 퍼포먼스하며, 표면에서의 비물질적 회화를 실험한 것이다. 이번 작업 <>에서의 거울 방은 지난 <방주>처럼 화려하지도 희극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이렇게 공간에 부유하다가 결국엔 중력에 내려앉을 수밖에 없는 허망하면서도 무거운 공기가 깔린다. 이 무게에는 비물질을 통해서도 가벼워질 수 없는 회화의 존재 조건이 담긴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가상 세계는 이 낱말이 어색할 정도로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있으며, 심지어는 현실과의 관계에서 전복적인 위치를 차지하기도 한다. 온라인이라는 가상 세계는 이제 현실계에서 불가능한 관계까지도 매개하며 실천과 발언의 공간이 되었다. SNS로 인한 소셜 네트워크는 가상을 더 이상 환영이 아닌 실제의 관계로 매듭지으며 확장해오고 있다. 나와 주변, 사회와 세계를 비추고 있는 이 가상의 스크린은 오늘날 현실보다도 더 생생한 현실계로 작동 중이다. 스크린의 창을 통해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미끄러지듯 유입되는 현대인에게 있어 그림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 가능할까? 스크린은 이제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매개시키며 또 다른 현실계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에서 거울 방을 통해 구축한 환영의 공간은 물질화된 표면으로 전환된 가상 세계를 은유한다.

 

<>에서는 이러한 가상과 현실, 동시대 작가와 화가라는 간극의 상황이 공간적으로 탐구된다. 바닥에 자리한 그림은 전시장 바닥의 한가운데 10(3.3)의 면적에 배치된다. 그림이 배치된 3x3칸 형식의 그리드는 인스타그램에 최적화된 9개 패널을 본뜬 것이다. 그림의 면적은 의 단위를 확장한 그리드, 현실계에 살아가는 최소면적으로서의 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닿을 수 없는 현실적 주거 단위를 제시하며, 바로 이 경계에서 그림의 거주를 시도한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은 그림 없는 벽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타인의 잔영을 바라보며, 상징적 의 그리드와 그림을 밟은 채 공간을 유영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평면화된 물질세계, 이를 향한 현실적 몰입을 끌어내야만 하는 화가의 욕망을 그림처럼 바닥에 내려놓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관객에게 굳이 회화로의 집중과 몰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 부유하는 공간에서 그림은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의 그리드가 중첩된 바닥에 자리하나 다소 개념에 의해 배열된 아쉬움을 남긴다. 거울의 환영에 에워 쌓인 관객에게 자신의 셀프 이미지는 바닥 그림의 존재보다 더 매혹적으로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이번 작업에 대해 작가가 쓴 글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두고 올 그림을 그린다.”에는 이러한 동시대성과 회화의 형식적 조건 사이에서 분투하는 젊은 화가의 실험이 담긴다. 휑한 거울 방 안에 마련된 바닥 그림은 가상공간의 최적화된 질서에 부합할 수 없는 회화의 존재 조건을 반어적으로 드러내 보일 것이다. 바닥에 자리한 그림은 부유할 수 없는 자신의 상태, 다시 말해 끊임없이 연기, 보류, 대기 중인 자신의 존재를 지시한다. 작가는 가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거리, 공백이라는 의 상태를 사유함으로써 그림의 존재를 밝혀나가야 한다. 바닥 그림을 조감도처럼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면 시선은 화면에서 발광하는 불온한 불빛에 의해 또다시 부유한다. 바닥, , 현실, 그림에도 고착될 수 없는 시선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에 로그인하는 스크린의 광()을 쫓는다. 거울 방에서 그림을 밟고선 아직 오지 않은 다가올 그림을 기다리는 동안 한 시인의 시구를 떠올려 본다. “무엇에 대해서 그는 돌진하지 않는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짊어져야만 한다.”

 

    

1) 필자가 표현한 다가올 그림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완성된 작업을 보지 못한 그림에 대한 지칭이자 전시장에서의 그림의 존재를 상상한 표현이다. 본 비평문은 필자가 황경현의 신작이 완성되기 전, 20177월과 9월 사이 3회에 걸친 미팅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것임을 밝힌다. 전시 설치 시 완성될 거울 방과 바닥 그림을 상상해야만 하는 필자는 작가의 말을 차용해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두고 올 글을 쓴다. 필자의 사유가 실제 작업과 너무 멀다면 가상 세계로서의 작업을 현실계로 상상한 비평가의 산물이라 여겨주길 바란다.

    

2) 본문에서 인용한 시구는 시인 파울 첼란(Paul Celan)의 시 불타오르는 거대한 하늘(Grosse, glühende Wölbung)(1967)의 한 문장이다.